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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장난감이 되기로 했다. 쓰고 버려져도 좋으니까.

타인의 변덕에 쥐어짜이는 말랑이 인형처럼 관계의 주권을 내어주었던 밤들에 대하여. 칸트의 존엄성과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를 빌려, 언제든 대체될 소모품이 아닌 목적으로 서는 법을 기록한다.

PHILOSOPHICAL LENS스피노자의 코나투스(자기보존 역량)와 칸트의 목적의 왕국 — 타인의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서기
By Director Jake (안동현)·2026.08.19·7 min read

차라리 쓰이다 버려지는 장난감이 낫다고 믿었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과의 관계에서 내 몫의 감정을 온전히 발음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곤 했습니다. 마주 앉은 상대방의 미세하게 굳어진 미간이나 반 박자 늦게 돌아오는 서늘한 단답 하나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행여나 이 얇은 관계의 끈이 끊어질까 두려워 먼저 비굴한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밤늦게 불쑥 찾아와 감정의 쓰레기를 쏟아내는 무례함도, 내 일정을 아랑곳하지 않는 무리한 부탁도 마치 너그러운 사람인 양 농담처럼 받아넘겼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때의 나는 그냥 가지고 놀아져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시간과 다정함을 남김없이 내어주고, 상대방의 무료함이나 외로움을 잠시 달래주는 용도로 쓰이다가 버려져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달랬습니다. 그 비참한 계절이 반복될 것을 예감하면서도, 그 사람에게 아주 찰나의 순간이나마 ‘유용하고 손이 가는 장난감’일 수 있다면 완전히 버려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는 애처로운 기대에 매달렸기 때문입니다.

말랑이 인형처럼 쥐어짜이며 고유한 윤곽을 잃어가는 밤

하지만 누군가에게 ‘편리하고 만만한 장난감’으로 머무는 삶은 필연적으로 자기 소멸을 부릅니다. 사람들이 무료하거나 답답할 때 손안에 쥐고 마음껏 주무르는 ‘말랑이 인형’처럼 말입니다. 상대의 기분에 맞춰 내 생각의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내고, 그가 쥐어짜면 쥐어짜는 대로 온몸이 일그러지며 나만의 고유한 형태를 잃어갑니다. 상대가 화풀이할 대상이 필요할 때나 심심한 밤을 채울 말상대가 필요할 때는 잠시 손바닥의 온기를 느끼지만, 흥미가 식거나 더 반짝이는 새 장난감이 나타나는 순간 가차 없이 먼지 쌓인 서랍 구석으로 내던져집니다.

바닥까지 닳아 문드러진 밤을 여러 번 지나고 나서야 나는 서늘한 진실 하나를 직시했습니다. 장난감에게는 결정적으로 ‘스스로 선택하고 거부할 권리’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언제 손에 쥐어질지, 언제 내팽개쳐질지를 오직 타인의 변덕에 맡긴 채 간택되기만을 기다리는 수동적 존재. 내 존재 가치의 스위치를 남의 손아귀에 넘겨주고, 그가 웃어주면 반짝였다가 그가 돌아서면 먼지처럼 바스러지는 삶은 헌신도 사랑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거절당할 때의 고독을 감당할 용기가 없어 자아의 주권을 스스로 반납해 버린 비겁한 자기방치였습니다.

가격을 매길 수 없는 존엄을 스스로 헐값에 내놓지 말라

이 비참한 연극의 본질을 가장 서늘하게 일깨워 준 철학자는 임마누엘 칸트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칸트의 도덕 철학을 ‘타인을 이용하지 말라’는 교훈으로만 읽지만, 칸트가 《도덕 형이상학 정초》에서 정언명령을 세울 때 가장 엄격하게 겨누었던 과녁에는 타인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똑같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만 대하지 않도록 행위하라.”

— 임마누엘 칸트, 《도덕 형이상학 정초》

칸트는 세상의 가치 있는 것들을 두 부류로 나눕니다. 언제든 비슷한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들은 ‘가격(Preis)’을 가지며,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고 모든 가격을 초월하는 내재적 가치는 ‘존엄성(Würde)’을 가집니다. 장난감에는 가격이 매겨지지만, 사유하고 의지하는 인격에는 오직 존엄성만이 깃듭니다. 내가 타인의 찰나적인 관심을 구걸하기 위해 스스로를 감정의 소모품으로 깎아내렸던 순간, 내 존엄을 가장 먼저 모독한 가해자는 무례한 상대방이 아니라 나를 헐값의 도구로 진열대에 올렸던 나 자신이었습니다.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타인의 손아귀에서 존재 역량을 회수하기

나를 수단으로 내어주는 관계가 왜 그토록 영혼을 메마르게 하는지, 바뤼흐 스피노자는 ‘코나투스(Conatus)’라는 개념으로 명쾌하게 해명합니다. 스피노자에게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본질은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고 자기 고유의 역량을 힘껏 긍정하려는 능동적 역량 그 자체입니다.

“각각의 사물은 자신의 역량이 미치는 한에서 자기 존재 안에 머무르며 이를 보존하려고 노력한다.”

— 바뤼흐 스피노자, 《에티카》 제3부 정리 6

스피노자의 시선으로 보면, 내 기쁨과 슬픔의 원인을 전적으로 외부 대상의 변덕에 묶어두는 상태가 곧 수동적 정념에 붙들린 ‘예속’입니다. 반대로 내가 내 감정과 행동의 온전한 원인이 될 때 우리의 행위 역량은 충만해지며 비로소 자유에 이릅니다. 나를 지워야만 유지되는 인연에서 걸어 나오는 일은 차가운 이기심이 아닙니다. 타인의 손바닥에 저당 잡혔던 나의 코나투스를 회수하고, 내 삶을 다시 능동적 긍정의 궤도로 되돌려 놓는 가장 윤리적인 결단입니다.

감히 함부로 쥘 수 없을 만큼 단단한 원석으로 서기 위하여

언제든 다른 것으로 손쉽게 대체될 수 있는 소모품으로 서랍 속에서 순서를 기다리던 어리석은 연극은 이제 영원히 막을 내리기로 했습니다. 무례한 요구 앞에서는 기꺼이 어색한 침묵을 감수하며 ‘아니오’라고 말하고, 내 경계선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이 떠나갈 때는 붙잡는 대신 등 뒤에서 조용히 문을 닫아주는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EDITORIAL NOTE

나를 깎아내려야만 간신히 유지되는 관계는 결국 나라는 존재 자체를 버리게 만듭니다. 누군가의 무료함을 달래는 부드러운 말랑이가 아니라, 스스로의 법칙과 무게로 서 있는 단단한 목적으로 살아가십시오.

상대의 기분에 따라 손쉽게 찌그러지는 고무 인형이 아니라, 함부로 쥐거나 흔들 수 없을 만큼 묵직하고 단단한 원석 같은 자아를 가꾸어야 합니다. 혼자 있는 밤의 적막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타인과도 수단이 아닌 대등한 목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당신과 나는 누군가의 손쉬운 장난감이 아니라, 그 자체로 온전한 존중을 받아 마땅한 하나의 독립된 우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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