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인스타를 지워버린다.
타인의 하이라이트 필름 앞에서 초라해지던 밤을 끝내기 위하여. 쇼펜하우어의 고독론과 파스칼의 고요한 방을 나침반 삼아, 디지털 전시장을 끄고 내면의 주파수를 복원한 기록.
엄지손가락 끝에서 펼쳐지는 타인의 전시장과 나의 비하인드 씬
하루의 에너지를 남김없이 쏟아붓고 돌아온 밤, 불 꺼진 침대에 몸을 뉘인 채 습관처럼 인스타그램 아이콘을 누르던 때가 있었습니다. 손바닥만 한 화면 속에는 에메랄드빛 해외 휴양지의 윤슬, 갓 출고된 외제차의 운전대, 화려한 투자 유치 소식과 샴페인 잔이 부딪히는 파티의 밤이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분명 오늘 하루 내 자리에서 치열하게 땀 흘리고 돌아왔건만, 엄지손가락으로 화면을 쓸어 내릴수록 내 방의 공기는 점점 남루해지고 가슴 한편에서는 정체 모를 조급함이 연기처럼 피어올랐습니다. 수백 명의 타인이 인생에서 가장 눈부신 찰나만을 정교하게 오려 붙여 만든 ‘하이라이트 필름’과, 땀 냄새 배고 지친 나의 편집되지 않은 ‘비하인드 씬’을 같은 저울 위에 올려놓는 순간 내면의 평온은 소리 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파스칼의 고요한 방을 침범한 손바닥 안의 소란스러운 광장
더 무서운 것은 그 현란한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내가 진짜로 원하는 삶’의 윤곽이 흐려진다는 점이었습니다. 붉은 알림 숫자와 타인의 시선에 정신을 빼앗긴 채 스크롤을 내리다 보면, 내 영혼이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자문할 틈도 없이 세상이 규정한 욕망의 표준이 내 머릿속을 점령해 버립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사실, 곧 고요한 자기 방 안에 홀로 머물 줄 모른다는 데서 비롯된다.”
17세기의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민낯과 마주하는 고요함을 견디지 못해 끊임없이 사교와 유흥이라는 ‘산만함(Divertissement)’ 속으로 도피한다고 통찰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방문을 굳게 닫고 침대 위에 홀로 누워 있으면서도 결코 홀로 있지 못합니다. 스마트폰이라는 작은 창문을 통해 수만 명의 구경꾼과 비교의 소음이 내 가장 내밀한 침실 한가운데로 밀고 들어와 파스칼의 ‘고요한 방’을 소란스러운 전시장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쇼펜하우어의 경고, 남의 머릿속에 내 영혼의 거처를 짓지 말라
타인의 시선에 포획된 시대를 가장 서늘하게 꾸짖은 철학자는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였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소품과 단상》에서 인간의 행복을 결정짓는 요소를 세 가지, 즉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존재)’, ‘그 사람이 무엇을 가졌는가(소유)’, 그리고 ‘타인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가(표상)’로 구분한 뒤, 인간이 가장 허망한 세 번째 항목에 영혼을 저당 잡히는 어리석음을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
“우리 행복의 절반 이상은 타인의 머릿속에 비친 내 모습이라는 허깨비에 집착하지 않는 데 달려 있다. 남들의 얕고 변덕스러운 의식 속에 자기 존재의 토대를 두는 자는 결코 내면의 평온에 이를 수 없다.”
쇼펜하우어의 문장은 정곡을 찌릅니다. 누군가가 내 게시물에 스치듯 누른 하트 하나는 3초 뒤면 그의 기억에서 사라질 얄팍한 잔상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변덕스러운 타인의 머릿속에 그럴듯한 환영을 세우기 위해, 정작 내 몸이 살아 숨 쉬는 귀중한 현재의 시간과 내면의 충만함을 아낌없이 제물로 바치곤 합니다. 존재의 알맹이를 비워 표상의 껍데기를 살찌우는 전도된 삶입니다.
앱 삭제 버튼을 누른 사흘째, 한강변의 바람과 만년필의 감각
그래서 나는 내면의 소음이 임계점을 넘을 때마다 스마트폰에서 인스타그램 앱을 미련 없이 지워버립니다. 처음 하루 이틀은 텅 빈 홈 화면의 빈자리를 엄지손가락이 허공처럼 더듬고, 세상의 유행과 소식에서 나 홀로 낙오되는 듯한 묘한 허전함이 발목을 잡습니다.
하지만 사흘째 밤이 찾아오면 거짓말처럼 깊고 투명한 고요가 방 안을 채웁니다. 누구에게도 인증할 필요 없이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고 밤의 한강변을 달립니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거친 호흡과 강바람의 감촉, 귓가를 울리는 좋아하는 노래의 선율에만 온 감각을 집중합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묵직한 만년필을 쥐고 미색 노트 위에 사각거리는 잉크 소리를 내며 내 날것의 사유들을 적어 내려갑니다. ‘보여주기 위해 연출하던 삶’에서 ‘온몸으로 경험하는 삶’으로 주권이 돌아오는 해방의 순간입니다.
고립이 아닌 자발적 고독 속에서 나만의 계절을 피워내다
쇼펜하우어가 말했듯, 인간은 오직 홀로 있을 때만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디지털 연결을 잠시 끊어내는 일은 세상과 단절된 외로운 고립이 아니라, 타인의 속도계에 빼앗겼던 내 시계의 태엽을 다시 감는 ‘자발적 고독’입니다. 봄에 만개하는 벚꽃이 화려하다고 해서 서늘한 늦가을에 피어나는 국화가 조급해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보여주기 위한 연극을 멈출 때 비로소 살아 있는 경험이 시작됩니다. 가끔은 세상의 모든 전시장을 끄고 침묵의 방으로 걸어 들어가십시오. 소음이 멎은 자리에서야 당신 영혼의 고유한 주파수가 선명히 들려옵니다.
타인의 피드를 훔쳐보며 내 계절을 재촉할 시간에, 나는 보이지 않는 땅속으로 내 뿌리를 한 뼘 더 깊고 단단하게 내리기로 했습니다. 오늘 밤 당신의 손안에서도 작은 화면의 불빛이 꺼지고, 오직 당신 자신만을 위한 깊고 평온한 고독의 시간이 시작되기를 바랍니다.
PHILOSOPHICAL DEEP DIVE · 이 에세이와 맞닿은 철학 원전 읽기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남의 머릿속에 세 들어 살지 않는 법, 고독이라는 정신적 귀족주의
PHILOSOPHY COLUMN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현대인에게: 쇼펜하우어와 파스칼이 말한 고독의 밀도
끊임없는 알림과 피드 속에서도 내면의 공허함이 가시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파스칼의 《팡세》가 꿰뚫어 본 '분산(Divertissement)'의 역설과 쇼펜하우어의 고슴도치 우화·고독 예찬을 통해 과잉 연결 시대에 내면의 침묵을 복원하는 지혜를 사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