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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장난감이 되기로 했다. 쓰고 버려져도 좋으니까.

나를 깎아내려 얻는 관계는, 결국 나를 버리게 만든다.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감정의 소모품이 아닌, 감히 쥘 수 없을 만큼 단단한 자아를 위하여.

By Director Jake(@toffthechicken)·2026.08.19

차라리 쓰이다 버려지는 장난감이 낫다고 믿었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과의 관계에서 내 몫의 감정을 온전히 주장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했습니다. 상대방의 사소한 눈치와 서늘해진 표정 하나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관계의 끈이 끊어질까 두려워 먼저 다가가 웃어주고, 무리한 요구를 농담처럼 받아넘겼습니다. 그냥 가지고 놀아져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시간과 감정을 실컷 내어주고, 상대방의 외로움이나 무료함을 달래주는 용도로 쓰이다가 버려져도, 그 비참함이 또다시 반복되어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속였습니다. 그래도 그 사람에게만큼은 아주 찰나의 순간이라도 '소중하고 유용한 장난감'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참으로 미련하고 애처로운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말랑이처럼 쥐어짜이고 형태를 잃어가는 삶

하지만 누군가에게 '재밌고 편리한 장난감'으로 살아가는 삶은 필연적으로 고달픕니다. 요즘 아이들이나 어른들이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손에 쥐고 주무르는 '말랑이 인형'처럼 말입니다. 상대의 기분에 맞춰 온몸이 일그러지고 쥐어짜이며 내 고유한 형태를 잃어버립니다. 상대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주거나 심심함을 채워주는 동안에는 손안에서 온기를 느끼지만, 상대의 흥미가 식거나 더 자극적인 장난감이 나타나는 순간 가차 없이 방구석 먼지 쌓인 서랍 속으로 내던져집니다. 쓸모가 다해 버려질 걸 뻔히 알면서도, 그 사람의 손에 잠시 쥐여 있다는 그 허망한 안정감 하나에 매달려 나 스스로를 장난감 취급하며 버텼던 밤들이 있었습니다.

장난감에게 결핍된 단 하나의 권리

스스로를 갉아먹으며 이런 비참한 바닥까지 내려앉고 나서야 서늘한 진실을 마주했습니다. 장난감에게는 결정적으로 '스스로 선택하고 거부할 권리'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언제 쥐어질지, 언제 내팽개쳐질지를 오직 주인의 변덕에 맡긴 채 수동적으로 선택받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존재. 내 자존감의 스위치를 타인의 손에 넘겨주고, 그가 칭찬하면 반짝였다가 그가 무관심하면 먼지처럼 바스러지는 삶. 이것은 다정한 배려도, 헌신적인 사랑도 아닌,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워 자아의 주권을 포기해 버린 비겁한 '자기방치'에 불과했습니다.

감히 가질 수 없을 만큼 단단한 사람이 되어야지

언제든 다른 것으로 손쉽게 대체될 수 있는 감정의 소모품으로, 누군가의 처분만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어리석은 연극은 이제 영원히 막을 내리기로 했습니다. 더 이상 누구도 내 경계선을 함부로 침범해 쥐고 흔들 수 없도록 내면에 단단한 뼈대를 세워야 합니다. 상대의 기분에 따라 찌그러지는 말랑이가 아니라, 감히 함부로 다루거나 쥘 수 없을 만큼 묵직하고 단단한 원석 같은 자아를 가꾸어야 합니다. 나를 깎아내려야만 간신히 유지되는 관계는 결국 나라는 존재 자체를 버리게 만듭니다. 당신은 누군가의 손쉬운 장난감이 아니라, 온전한 존중을 받아 마땅한 하나의 독립된 우주입니다.